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띠리리리―

띠리리리― 주말 아침, 알람 시계가 조용했던 집안 공기를 힘차게 울린다. 나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표시된 빨간 동그라미를 본 뒤, 깜짝 놀라 잠기운이 다 달아나버렸다. player [player]맞다. 오늘은 히데키랑 승마장에 가기로 했었지! 내 평소 활동 반경에 승마장은 포함되지 않지만, 그곳을 약속 장소로 잡게 된 데에는 사연이 있다. 마작부 활동이 끝나고 부원들이 모두 떠났을 때였다. 부실 뒷정리를 하고 있는 히데키를 보며, 그를 도와 수기로 작성해 둔 당일의 패보를 찍어 저장해 주기로 했다. 패보를 어떤 기기로 찍으면 좋을지 물어보기도 전에, 히데키는 휴대폰의 잠금을 풀더니 곧바로 내게 건넸다. [player]그냥 준다고? 내가 네 휴대폰 속 비밀을 알게 되는 게 두렵지 않아? 아케치 히데키 [아케치 히데키]아마 저희 사이에는 비밀이랄 게 없을걸요? 이 상황이 좀 석연찮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듣고 보니…… 왠지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이어서 나는 애꿎은 코를 어루만지며 그가 건네준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두껍게 쌓였던 패보를 모두 찍어 저장했다. [player]부장의 업무란, 쉬운 게 아니네…… [아케치 히데키]이제 곧 끝나요. 힘드실 테니까, 일단 저 옆에 앉아서 좀 쉬고 계세요. [player]하하, 그럴까? 나는 의자에 앉아 방금 전 찍은 사진들을 다시 확인해보기로 했다. 하지만 찍은 사진이 너무 많아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슬라이드를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전에 찍힌 사진까지 넘겨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히데키의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던 사진 한 장이 내 눈에 들어왔다. [player]이건……? 사진의 배경은 녹색으로 뒤덮인 풀밭이었고, 그곳에 놓인 시상대 위엔 세 사람이 서 있었다. 사진 속에는 스무 살의 히데키가 주인공이 되어 트로피를 높이 들곤 그다운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4년 전의 사진이 히데키의 사진첩 속에서 지금껏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 이 사진이 그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히데키가 정리를 마치고 내 옆에 다가오기 전까지, 사진을 바라보며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아케치 히데키]흠, 이건 예전에 승마 시합에 나갔을 때의 사진이군요. 그땐 부모님께서 일이 바쁘셔서 시합에 오지 못하셨어요. 코치님께서는 현장의 분위기를 부모님께 꼭 전해드려야 한다면서 사진을 찍어 주셨죠. [player]내가 알기론, 승마 종목은 18세 이상만 참가할 수 있을 텐데……? [아케치 히데키]대형 국제 시합에는 그런 조건들이 있지만, 이때는 시 단위의 청소년 시합이었거든요. 14세 이상이면 참가할 수 있었죠. [아케치 히데키]사실 처음 승마를 배운 건 아버지가 시키셔서였는데, 계속 하다 보니까 저도 이 스포츠가 좋아져 버렸어요. 말을 타고 있으면 시간이 항상 빠르게 지나가서, 해가 지고 나서야 훈련이 끝나는 날도 종종 있었죠. [player]그랬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공자와 승마'에 대한 설정을 받아들였다. [player]그럼 혹시 지금도 승마를 배우고 있어? 그럼 나도 현장에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아케치 히데키]청소년 시합에서 우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께서 쓰러지셨는데, 그때부터 아버지께서 제게 주시는 숙제가 부쩍 늘어나 버렸죠. 그래서 훈련할 시간도 대폭 줄어들었구요. [아케치 히데키]그래서 정말 아쉽긴 했지만, 고민 끝에 결국 승마를 잠시 그만두기로 결정했어요. [player]정말 아쉽네…… 계속 했으면 지금쯤 국가대표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인데. [아케치 히데키]PLAYER 씨께선 절 높게 평가하고 계시는군요. 그는 멋쩍게 웃어넘겼지만, 난 그의 미소에서 한줄기의 아쉬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말과 표정에서, 히데키가 예전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듯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당연히 아쉬움이 남을 것이다. 나는 사진으로 시선을 돌리며, 그에게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주었다. [player]흠, 이 사람은 누구야? 사진 속 히데키의 오른쪽에 서 있는 소년의 잔뜩 일그러진 표정에서 못마땅함을 느끼고 있는 게 느껴졌다. 마치 찡그린 표정의 이모티콘을 보는 듯 감정이 명확히 드러나 있었다. [아케치 히데키]아, 이 사람은 레빈이라고 해요. 당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죠. 자신의 우승을 거의 확신하고 있었는데 점수가 발표된 뒤, 저한테 0.5점 뒤처졌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는 거의 폭주 상태가 됐어요. 코치도 어쩔 줄 몰라 하더라고요. [player]아, 아무래도 그 사람은 '프로 불편러'였나보군. [아케치 히데키]'프로 불편러'요? 하하, PLAYER 씨는 항상 독특하면서도 상황과 딱 들어맞는 단어를 말씀해주시네요.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레빈은 그 시합 이후로 코치에게 더 강하게 훈련시켜달라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말과 교감을 쌓기 위해 마구간에서 지내기까지 했던 모양이에요. 모두 제게서 우승 타이틀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였겠죠. [player]그래서? 어떻게 됐어? [아케치 히데키]그 뒤론……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전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승마를 그만두었고, 시합에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죠. 물론 그 뒤로도 레빈을 몇 번인가 우연히 마주친 적은 있지만…… 전 이미 단단히 미움을 산 모양이었어요. [player]널 뛰어넘지 못한 게 계속 마음에 걸렸던 걸까? [아케치 히데키]표면적으론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히데키는 드물게 내 생각을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금색 머리카락이 아래로 찰랑이며 그의 푸른 눈동자를 가렸다. [아케치 히데키]하지만 레빈이 계속 그러는 이유는, 사실은 절 이기지 못한 게 억울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절 생각해 주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player]엥? [아케치 히데키]레빈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질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도중에 포기하게 된 저를 보는 게 안타까웠을 거예요. 다만, 그의 성격상 이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는 못했던 거겠죠. [아케치 히데키]결국, 레빈은 사실 승마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거로군. 히데키의 진지한 모습에, 난 그가 자신의 '숙적'을 미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나아가, 그 상대와 히데키가 다시 만나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마저 들기 시작했다. 자신이 이룰 수 없다면, 이 스포츠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다른 이가 본인을 대신하여 최고의 기수가 되어 주는 것도 결코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실로 히데키다운 생각이었다. [아케치 히데키]전 더 이상 승마를 하지는 않지만, PLAYER 씨에게 말을 타게 해 주는 건 가능해요. [player]!!! [player]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지?! [아케치 히데키]네, 당시에 저랑 같이 우승을 했던 말이 아직 이한시 교외의 승마장에 있어요. 마침 이번 주말에 보러 가려고 했는데, 관심이 있으시다면 함께 가실래요? [player]물론이지, 그럼 그렇게 정한 거다! 꼭 나와야 돼! 회상은 여기까지 하고,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시침은 현재 7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히데키라면, 분명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 있을 것이었다. 때문에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길을 재촉하기로 했다. 복잡한 도시 중심과는 달리, 교외는 상당히 적막한 분위기였다. 메케한 자동차 매연도 없이 그저 은은한 초목의 향기만이 풍겨오는 이곳은 상쾌하고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역시 나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른 시간에 히데키를 승마장 입구에서 마주쳤을 때, 나는 서둘러서 미리 집을 나섰던 자신에게 칭찬을 해 주고 싶었다. [player]히데키, 좋은 아침! [아케치 히데키]좋은 아침이에요, PLAYER 씨. 말들의 활동 시간에 맞추려면 이른 시간에 만날 수밖에 없어서요, 혹시라도 부담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player]이불이랑 이별하는 게 아쉽긴 했지만, 말들이랑 호흡을 맞출 수 있다는 생각에 눈이 확 떠지더라고. 네가 여길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난 이한시 근처에 이렇게나 큰 승마장이 있다는 사실을 영원히 몰랐을 거야. [아케치 히데키]이곳은 회원제라, 손님들 사이에서만 추천 형식으로 홍보가 이루어지고 있죠. 시내에서 홍보를 안 하니, PLAYER 씨께서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히데키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진 휘황찬란한 로비에 전율이 일었다. 수백 명은 족히 들어갈 넓은 공간에 다채로운 색깔들이 어우려있었고, 곳곳에서 대자연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로비에는 일정 간격으로 정교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그중 몇 작품은 나도 TV에서 본 적이 있는 것들이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것들의 가격표에 붙어 있던 “0”의 개수가 몇 개였는지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로비의 벽에 걸린, 8마리의 준마가 그려져 있는 저 거대한 그림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지. [player]이게 바로 뉴스에 나왔던, 10억 코인에 낙찰된 <팔마질주도>인가? [아케치 히데키]이건 코우시 선생님의 마지막 작품이에요. 선생님은 이 작품을 만든 이후로 활동을 그만두셨죠. 그래서 이 작품을 정말 좋아하거나, 투자하기 위해서 작품을 노리던 수집가들도 정말 많았어요.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모습이 보기 싫으셨던 건지, 결국 이곳에 그림을 넘겨 버렸죠. [player]<팔마질주도>가 여기 걸려 있는 걸 알면, 코우시 선생님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해. 아름다운 예술품, 명작 그림, 호화로운 로비…… 이곳을 세우는 데 들어간 액수가 결코 만만치 않을 것이란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게다가 이곳에 개인의 말을 케어해 줄 수 있는 사육장까지 보유하고 있다면, 그 비용은 분명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평소 동아리 활동 중에 히데키가 곧잘 간식을 사 주는 모습을 보며 분명 범상치 않은 집안의 자재일 것이라 예상을 하긴 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히데키는 이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곧 내게 물었다. [아케치 히데키]이 승마 목장에 처음 오신 걸 테니, 제가 직접 소개해 드릴까요? 아니면 따로 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으신가요?